글쓴이:박상균님 | 날짜:2007-08-21
김영갑의 혼이 숨 쉬는....
저는 실버타임즈 박상균 기자입니다
오늘 시간이 있고 더위를 식히려 대청마루?에 누어 김영갑 도록을 보며 제주에서 보았을때와 감정을 되새기며 보고 홈에 와 보니 인터뷰에도 아무대도 글이 올려 있지 않군요
분명이 신문은 보내 드렸는데...
그래서 직접 올리는 길은 여기밖에 없어 올리니 마스타께서 적의 처리 바랍니다.
문화나눔터-김영갑갤러리 / 제67호, 2007년 4월 1일 간 박상균 기자
2007/04/10 10:48
http://blog.naver.com/silvernp/10016143694
제주의 사진작가 김영갑의 혼이 숨쉬는 두모악 갤러리
제주도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하 ‘두모악’)을 가보지 못한 제주도민이 있다면 제주 사람이 아니고 제주도에 가서 ‘두모악(한라산의 옛 이름)’에 들리지 못했다면 제주도를 반 쪽밖에 못 본 것이다. 진실한 사진 예술을 알고 진실한 삶의 혼을 알려면 ‘두모악’을 보라고 한다. 제주도에 돌, 바람, 여자의 ‘삼다(三多)’가 있다면 두모악에는 오름, 바람, 혼(魂)의 삼다가 있다. 제주의 자연과 예술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두모악’이다. 폐교에 만든 갤러리는 제주의 자연풍광을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의 속살을 보고 제주의 찬가를 듣고 김영갑의 혼을 느끼면서 인생 철학까지 얻을 수 있다.
갤러리를 말하기에 앞서 49세 총각으로 고인이 됐으며, 생전(生前)에 이름을 알렸다면 사후(死後)에는 명성(名聲)이 더 빛났을지도 모를 김영갑 사진작가를 소개하는 것이 갤러리의 작품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사진작가 김영갑은 1957년 부여에서 출생,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한양공고를 입학하면서 서울 사람이 됐다. 제대 후 우연히 제주도에 갔다가 제주의 두모악과 오름, 그리고 바람에 매혹을 느낀 그는 변변한 카메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1985년 제주도에 정착했다. 겨우 필름 몇 통 살 돈만을 가지고 집도, 절도, 지인도 없는 제주에 온 그는 그로부터 고행의 길이 시작된다.
그의 눈에는 두모악과 오름, 바다와 해녀, 바람과 갈대만이 보일 뿐 배고픔도, 잠자리도, 다 잊는다. 예술가의 길이 대부분 그렇 듯 좋은 사진을 찍은 들 즉시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찍는다고 다 작품이 되는 것도 아니며 매일 작품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멀쩡한 사람이 매일 혼자서 카메라나 메고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종일 삼각대나 펼쳐 놓고 있으니 누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 하겠는가? 그래서 간첩으로 오해받아 카메라를 압수 당하고 구류까지 당하며 허기진 배와 비, 바람 가릴 곳조차 없는 그였지만 그의 예술 혼만은 막을 길이 없었다. 결혼도, 형제의 인연도 끊고 오직 사진밖에 모르는 그는 필름 살 돈이 없으면 막노동을 했고 먹을 것이 없으면 냉수 한 그릇으로 배를 달래며 ‘찰나의 영상시’만을 상상하고 촬영하는데 생을 바쳤다.
제주는 바람이 부는가 싶으면 햇살이 고개를 내밀고 파란 하늘이 보이는가 하면 구름이 덮고 한라산에 눈이 오는가 하면 오름에는 파란 새싹이 나고… 그래서 그는 더욱 제주를 좋아했다. 태풍이 불어닥치면 바다로 나갔다. 태풍을 찍기 위하여 몸을 밧줄로 바위에 칭칭 감고 벼랑 끝에서 태풍을 찍고 파도를 찍고 노을을 찍는다. 그러나 작업실 하나 제대로 없고 창고 하나 없는 작가 김영갑은 수많은 필름과 사진이 비와 바람에 젖는 것을 보는 순간 애절한 마음에 포기하기를 몇 번이었던가? 그래도 그는 사진을 찍는 순간, 작업을 하는 순간이 제일 행복한 삶의 순간이라고 말했다.
불행이 왔다. 1999년 여름, 카메라도구를 내려놓는데 손에 힘이 주어지지 않아 털썩 놓으며‘오늘 너무 무리했나?’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혹한 천형(天刑)이었다. ‘루게릭병’이었다. ‘루게릭병’은 ‘근위축성경화증(筋萎縮性硬化症)’으로 현대의학으로는 아직 원인을 알 수 없고 완치용 치료제가 딱히 없어 발병 3~4년이면 죽고 마는 희귀병이다. 병원 진단은 길어야 5년이었다. 포기하지 않은 그는 카메라 셔터만 누를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그 몸으로 제주의 오름 368개를 오르고 또 올랐다. 오름을 오르는 것은 신의 힘이지 그의 의지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한계에 다다르니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고 형제들이 집에 가서 투병하자고 간곡히 말했지만 그는 제주의 삼다 혼에 끌려 뿌리치고 20여 년간, 20여 만장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갤러리를 만들 생각만 했다. 이 때에 현재 관장 박훈일(朴訓一, 39세)씨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았다.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 폐교를 임대 받고 한라산의 옛 이름 ‘두모악’의 이름을 따서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이 탄생했다. 70kg의 몸이 47kg으로 줄고 생리작용 처리조차 못하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그는 정신적으로 갤러리를 만드는데 혼신의 힘을 부어 운동장을 미로(迷路)식 정원으로 만들고 교실 5칸을 사무실과 1․2 전시실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드디어 2002년 여름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개관했고 2년 여 활동하다가 2005년 5월 29일 생명의 잔을 비웠다. 그의 육신은 한 줌의 가루가 되어 갤러리 화단에 뿌려졌으나 그의 혼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갤러리는 3천 여 평의 대지에 전시 면적 200여 평으로 우리나라에서 사설 사진박물관으로는 1호이다. 지금 갤러리에서는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과 ‘2주기 추모전’이 각각 전시되고 있으며 ‘마라도 사진첩’의 발행 준비도 하고 있다. 작년에는 한국내셔널 트러스트에서 시상하는 ‘잘 가꾸어진 자연유산’으로 선정되어 관광공사에서도 추천을 받았다. 박관장은 “금년에는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의 주 촬영지인 둔지봉 ‘알 오름’을 답사하며 고인의 추억을 되새길 예정”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3회를 비롯하여 총 20여 회 전시를 가졌으며 ‘1995년 최남단 마라도’를 시작으로 총 8권의 사진첩을 출간했고, 에세이집으로는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등 3권을 출판했다. 박 관장은 김영갑 작가가 좋아 집에 모셔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선생의 유업을 전수 받게 되었고 유작 필름 20여 만장이 햇볕을 볼 수 있도록 만들 의무를 느낀다면서 갤러리와 함께 선생의 혼이 영원히 숨쉬게 하겠다면서 눈자위가 붉어지는 것을 보는 기자는 명치끝이 아려옴을 참으며 갤러리를 떠났다.
(홈페이지 www.dumoak.co.kr, 문의 064-784-9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