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월간태백 2017/ 1] 푸르른 생이 저기 흘러가네
푸르른 生이 저기 흘러가네
사진작가 故 김영갑 선생의 삶과 길


프롤로그

너, 하늘로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돌아올 땐 용눈이오름으로 올까, 아니면
아끈다랑쉬오름에 내려 할머니에게 문안드릴까
孺人高氏之墓 (유인고씨지묘)
할머니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혼자이시다

이여사나 이여도사나
(중략)

우리 이대로 떠 있으면 안 돼?
새소리 파랑새소리
새들도 떠 있는데
우리라고 떠 있으면 안 돼?

-이생진, 「잃어버린 마을에서의 패러글라이딩」부분


두모악, 그리고 김영갑

섬, 제주의 이마는 한라산이다. 이마의 온도와 풍경은 수시로 변한다. 섬에 사는 이들에게 신성하고 경건한 존재인 한라산. 꼭 설문대 할망 전설이 아니더라도 어디서 바라보든지 섬 전체를 품고 있는 한라산은 모성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오래전 한라산에서 튕겨 나간 돌과 흙이 굽이굽이 오름이 되고 길이 되고 섬이 되었다. 두모악(豆毛岳)은 한라산의 옛 이름이다. 섬은 많은 것을 품고 있어 신비로운지도 모른다. 
정작 무엇을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은 사물의 포즈를 포착하는 일이다.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일상이라는 지리멸렬(支離滅裂)을 견디기 위해 새로운 것을 찾아 떠나고, 일탈을 하고, 탈선을 하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들의 배경에는 풍경이 있었다. 실로 자연스럽게 생겨나 자연이라고 부르는 풍경은 사람보다 더 가까운 존재다. 홀로 걸어가는 길에서, 험한 절벽을 올라야 하는 정상에서, 탁 트인 바다에서 우리는 더 많은 위안을 얻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쌓인 관계의 실타래를 풍경에서 풀어낸다. 그것이 우리가 풍경을 바라보는 이유일 것이다.
오롯이 풍경만을 위해 존재했던 사진작가 故김영갑 선생. 그는 1957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1982년부터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면 사진 작업을 하던 중 1985년 제주에 정착했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의 일이다. 밥 먹을 돈을 아껴가며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에서 캐다 남긴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해안가에서 중산간으로 끊임없이 이사하면서 오해를 받기도 하고, 굶는 날도 많았지만 사진 찍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제주의 오름이 그가 있어야 할 곳이고, 그가 담아야 할 풍경이었다. 운명보다 질긴 숙명. 그 어떤 것도 참고 견딜 수 있었지만, 필름만은 목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2001년 성산포 길목에 폐교로 방치된 초등학교를 발견했다. 그곳에 정착하기로 마음먹고 하루하루 전시관을 만드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창고에서 곰팡이 꽃을 피우는 사진들이 햇살을 받을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났다.
그러나 좋은 일엔 나쁜 일이 함께 온다고 했던가. 어느 날부터 이유 없이 허리 통증이 오고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카메라를 들지도,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3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다. 일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몸을 움직여 전시관 만들기에 열중했다. 이렇게 해서 2002년 여름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문을 열었다.
그러나 투병 생활을 한 지 6년 만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그가 손수 만든 두모악에서 고이 잠들었고, 그의 뼈는 두모악 마당에 뿌려졌다.


생의 전부를 필름에 건 남자

왜 하필 제주였을까. 왜 스물여덟의 그 젊은 나이에 별 볼 일 없는 섬 구석으로 스며든 것일까. 수시로 불어대는 바람만큼이나 견뎌야 할 외로움이 많은 제주도. 무엇이 그를 이곳으로 스며들게 했을까.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어느 지역 출신이냐는 물음에 ‘아테네’가 아니라 ‘세계’라고 대답했다. 프랑스의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역시 자신이 태어난 곳이 출신지가 아니라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장소’에 국적을 부여하자는 말을 해왔다. 우리는 태어날 곳을 미리 정할 수 없는 것처럼 그곳에 붙박여 살 이유도 없다. 하지만 제 고장 사람이 아니면 경계부터 하는 것이 다반사다. 그 역시 꼬리표처럼 뒷말을 달고 다녀야 했다. 옷차림도 허름하고 하릴없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이니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시골인심이 좋다고 하지만 시골이야말로 어느 집에 숟가락 몇 개가 있다는 것도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 오히려 낯선 이를 경계한다. 자신들의 영역에 이방인이 들어와 지금까지 유지해왔던 분위기가 깨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특히 제주는 다른 지역과 다르게 이방인에 대한 경계가 심한 편이다. 크고 작은 상처가 섬의 내력을 말해주듯 가슴에 화인처럼 박혀 있는 제주 4·3사건은 지울 수 없다. 아니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쳐 말 한마디로 저승과 이승을 오갔던 사람들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섬사람들의 터전을 한순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사건이다. 사람으로 생긴 상처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그가 제주의 중산간 마을에 들어왔을 때도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다. 젊은 사람이 일도 안 하고 빈둥거린다며 세를 주지 않았고, 종종 간첩으로 오인해 신고하는 바람에 그는 경찰서에 잡혀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파노라마(6x17)카메라와 장비를 둘러 메고 들녘으로 향하는 김영갑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아 여기저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지냈고, 가끔은 혼자 사는 노인들 말벗을 해주며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생활은 궁핍했고, 겨우 친구의 도움으로 어촌에 방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주인집이 경매로 넘어갔고, 이사 가는 주인집에 부탁해서 재래식 부엌을 쓰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4·3사건을 겪은 할머니는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고, 불화 끝에 결국 2년간 살던 애월읍 바닷가를 떠나 중산간 마을로 이사했다.
제주도에서 가장 힘든 것은 곰팡이와의 싸움이었다. 제주는 바람과 함께 습도가 높다. 장마가 빨리 시작되는 데다 오래가기 일쑤다. 모든 것이 눅눅해지고 곰팡이가 여기저기 활개를 친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필름이다. 여기저기 특히 시골에서는 필름에 곰팡이가 피지 않도록 최대한 습기를 없애고 통풍이 잘 들도록 신경 써야 했다.
그리고 또 그는 마음이 울적한 날엔 바느질을 했다. 좋은 옷 사 입을 돈으로 필름을 사야 했기에 자투리 천으로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고 커튼을 만들기도 했다. 제주에서는 광목에 감물을 들여 갈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 역시 갈옷을 즐겨 입었고, 갈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는 오직 필름을 사고 사진을 찍는 데에만 돈을 썼다. 그가 궁핍함 속에서도 섬을 버릴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섬의 오지를 찾아다니며 초가집, 돌답, 팽나무, 노인, 아이, 해안 마을, 중산간 마을, 초원, 바다, 오름을 닥치는 대로 필름에 담았다. 제주에 내려오기 전, 섬의 역사와 작업할 것들을 나름대로 정리해놓았기 때문에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었다.
-김영갑 포토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 2004) 중에서

그는 섬을 사랑했다. 오랜 시간 흘러온 세월의 흔적, 그 때묻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는 사물을, 풍경을 사랑했다. 너도나도 새것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옛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남들이 아무리 미쳤다고 손가락질해도 상관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하는 이 일이 분명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테니까.
그렇게 시작한 것이 갤러리 두모악이다. 제주에 관련된 자료를 정리하고 사진들도 볕을 보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어느 날 갑자기 마비 증상이 찾아왔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희귀병이었다. 치료법도 없다고 했다. 민간요법에서부터 치료라는 치료는 다 해보았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밥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말라가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생(生)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죽음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의 방엔 아직 현상하지 못한 필름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인연이라는 풍경

지금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은 박훈일 관장이다. 그에게 김영갑과의 인연을 물었다.
“인연이라는 것, 참 무섭다. 1987년 늦가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김영갑 선생님과 만났다. 그때 나는 그냥 삼촌이라고 불렀다. 우리 집에서 같이 살았는데, 삼촌이 필름 현상이나 인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혼이 담긴 열정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하지마나 내가 처음부터 사진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호텔에 취직해 일하면서 틈틈이 삼촌의 작업을 도와주는 정도였다. 그러다 드디어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삼촌의 사진 작업을 함께 도와주고 쭉 봐왔던 터라 당연히 좋아하실 줄 알았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에게 한가지 약속을 하기 전에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했다. 
‘정말로 사진이 찍고 싶다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진을 찍어야 한다.’
나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다 그러겠다고 굳은 맹세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사진을 찍기에 들어갔다. 직장도 그만두었다. 한 가지 일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길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 길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너무 멀리 와버려서 되돌아갈 수도 없었다. 렌즈를 통한 사물과의 만남은 내 삶의 전부를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20년이라는 세월을 훌쩍 넘기고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불혹을 훨씬 넘긴 중년이 되었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자나가지만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분명하다. 이곳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어떻게 보존하고 작품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받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일이다. 처음 선생님께서 이곳을 만들 때 했던 고민이 여전히 나에게도 숙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여기저기 흔들리지 않으며 묵묵히 나의 길을 갈 것이다.
‘훈일아, 6월이 되면 안개 사진 찍어야지.’
아직도 그 말이 평생 화인으로 남아 가슴을 울린다.”


풍경, 기억의 재구성

2005년 1월 서울에서 「내가 본 이어도1: 용눈이오름」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이 열렸다. 그리고 2005년 3월 24일부터 4월 5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신관 전시실에서는 「내가 본 이어도 2: 눈, 비, 안개 그리고 바람 환상곡」과 「내가 본 이어도 3: 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이라는 주제로 사진전이 열렸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그저 풍경을 찍은 사진이 뭐 그렇게 대수롭냐는 것이었다. 모네(Claude Monet, 1840-1926)가 처음 인상파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많은 이들이 비난했던 것처럼.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 클로드 모네는 자신의 그림 제목에 대해 “풍경이란 건 오직 인상, 즉물적(卽物的)인 인상이라서”라는 말을 했다. 모네는 사물을 강조하면서, 사물들의 인상이 이 그림을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모네는 제목에 ‘인상’이라는 것을 포함시켰다고 고백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장소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눈에 보이는 사실적인 풍경보다는 사물의 인상에 초점을 두고 그리려 했다.
풍경화는 보이는 풍경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나에게 남긴 인상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이다. 사물의 인상을 다시 사물화하는 것이 인상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풍경화는 외부의 사물이 아니라 내부의 정서를 드러내는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도 그렇다. 비록 카메라의 렌즈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풍경의 포즈(pose)는 찍는 이마다 다르다. 풍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늘 변화무쌍(變化無雙)하고 잠시도 같은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풍경을 담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물이 말을 하고 풍경이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풍경의 시간은 곧 나의 시간인 것이다.
그의 사진엔 제목이 없다.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도 여럿이다. 그림에서 인상파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비록 하나의 고정된 풍경이지만 각자의 경험과 삶의 철학 혹은 생각의 깊이에 따라 달라 보인다. 그가 의도한 것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그는 오름과 오름 위에서 바라본 하늘과 구름, 그리고 그곳에 불어오는 바람을 많이 담았다. 거친 제주 날씨를 이해하고 끌어안으며 그만의 방식으로 풍경을 마주했다. 사람들이 안개와 비 날씨로 투덜대며 돌아갈 때도 그는 느긋하게 기다려 풍경의 시간을 담아냈다. 기다림과 인내 없이는 원하는 작품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랑쉬오름에 오를 때 힘이 빠져서
네게로 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바람이 도와줬어
바람은 보이지 않는 뱀
얽히고 설켜도 보이지 않아서 비밀에 좋아
바람은 보이지 않는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고 있어
이제야 안심하겠네

- 이생진, 「바람의 힘」부분

오름이 거기 있었다. 섬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오름이다. 두모악을 타고 흘러내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의 혹처럼 봉긋해서 솟아있는 오름. 그중에서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은 다랑쉬오름과 용눈이오름이다. 다랑쉬오름 정상에서는 한라산을 비롯해 우도, 성산일출봉, 지미봉, 용눈이오름, 아끈다랑쉬오름까지 한눈에 제주의 풍경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용눈이오름 역시 용의 등처럼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져 가을이면 억새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그가 제주를 찾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오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오름을 오르는 이들도 많고 오름 동호회까지 생겨났지만, 당시 오름을 오르는 이는 소나 말, 그리고 그곳에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오름에서 제주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제주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사계절, 아니 날씨에 따라 오름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낯선 얼굴을 내민다. 어제와 오늘도 다른 모습이다. 매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오름을 오르면서 삶이라는 거울을 생각한다. 똑같은 일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삶은 하루하루 조금씩 다르다. 다르다고 인지하는 것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삶의 주인이 내가 되느냐 아니면 삶에 떠밀려 사느냐 하는 문제다. 오름은 숨이 차오를 만큼의 시련을 주지는 않는다. 오를 수 있을 만큼의 적당한 높이다. 높지는 않지만 그 안에 삶이 들어있다. 정상에 오르면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드디어 존재에 대해, 살아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서 특히 눈길을 사로잡은 사진은 붉은 노을에 오롯하게 선으로만 존재하는 오름 풍경이다.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움, 삶에 있어 가장 어려운 숙제가 그 안에 있다.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고 미움을 내려놓고 단순하게 살라 한다.
구름은 순간의 서정이다.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오름 위에서 보는 구름은 더 가까이 잡힌다. 그리고는 흘러가라 흘러가라 한다. 구름이 시간이고 세월이다. 서로 뭉치다가 흩어지다가 먹구름이다가 말간 흰 구름이다가 아예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하늘에 구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구름이 느긋하게 흘러가면 내 마음도 수굿해지고, 구름이 조급해지면 덩달아 마음도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구름을 변화를 좇아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며 섬에서 20년 세월을 보냈다. 구름은 단 한 번도 같은 모습을 하지 않는다. 변화무쌍한 구름을 쫓아다니며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깊은 생각에 잠기곤 하며 긴 세월을 지나왔다고’ 했다.
구름이 구름인 동시에 나인 것. 아마 인간이 자연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자연과 가까이 있을 때 가장 평화롭다는 것을. 결국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적인 삶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바람에 길을 묻는다. 오늘도 오름 위에 바람이 분다. 그 바람에 마음을 들키기도 한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야 할까 묻지만 바람은 수시로 방향을 바꾼다. 알 수 없다. 내가 가는 곳이 어딘지는. 그러나 바람이 없는 곳은 멈춰있는 곳이다. 정지된 삶이다. 흔들리고 흔들리며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저 초록의 풀잎들도 앙상한 나뭇가지의 흔들림도 모두 삶의 한순간이다. 그 순간을 견뎌내야 성장하고 또 깊어진다.
바람을 카메라에 담기는 쉽지 않다. 눈으로 보는 것은 그 흐름을 따라가는 일이지만 카메라로 찍는 일은 정지된 순간을 담는 일이다. 형체도 없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것을 담아내는 일이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다. 눈에 담긴 모습 그대로 카메라로 옮길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을 김영갑 선생은 알고 있었을까. 바람이 보인다. 그가 찍은 사진은 눈으로 찍은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다. 바람이 되어보지 않으면 담을 수 없다. 그가 바람이 되어 떠돌아다녔기에 바람도 그를, 그도 바람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기억을 담고 있는 도구다. 풍경의 기억들도 실은 우리 내면에 자리 잡은 깊은 구석이다. 그 구석진 곳을 꺼내어 볕을 보게 하는 일이다. 오름 위로 흘러가는 구름과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순간의 기억이, 순간의 서정이 거기 고스란히 스며들었던 것이다.

골똘히 들어가, 김영갑갤러리두모악

2002년 여름에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문을 열었다. 그 사이 졸참나무 이파리처럼 더 야위어갔고, 영혼의 빛깔은 그가 사랑한 마라도 물색으로 짙어져갔다. 그럭저럭 단장을 끝낸 두모악 담벼락에 기대 밤새워 별을 쳐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3년쯤 더 살면 잘사는 거라네!”
부랴부랴 제주로 달려온 친구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는 두모악 옥상에 올라가 삼달리 앞바다를 보여주었다.
- 정희성 선생님 글 중에서

사람들은 이곳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사진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감동을 받고 간다. 제주에 사는 사람들 역시 오름과 구름, 바람을 다시 보게 된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매일 보는 풍경이 새삼 다를 게 뭐가 있냐고 투덜댄다. 하지만 김영갑 선생의 사진 앞에 서면 무심코 흘려보냈던 풍경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새로운 기억으로 다가온다. 마음으로 찍은 사진이라서 그랬을까. 수십 번 오름을 오르내리고 주변을 돌면서 풍경과 마주한 탓일까. 갤러리 안에 걸린 풍경을 보는 순간 갑자기 먹먹해진다.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사진이 아니다. 누군가를 오래 기다려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상처를 지나온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억이다. 내 삶에 저런 순간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아직도 지나고 있는지 곰곰 되뇌어 보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미술관으로는 유일하게 문화체육관광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2015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되었다. 유명한 유적도 역사적 공간도 아니지만, 오롯이 한 사람의 생이 담긴 이곳이 선정되었다는 것은 꽤 의미가 깊다. 그의 혼이 담긴 사진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풍경이 사람을 보게 하고 기억을 되돌린다. 
그래서 이곳은 혼자 오는 공간이다. 여럿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구경하는 곳이 아니다. 자연과 이야기를 하는 소통의 공간이다. 오름에 올라 흘러가는 구름에 시선을 빼앗기고 골똘히 그 바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소리를. 그가 이곳을 만든 이유도 거기에 있으리라.


에필로그

얼마나 오래 침묵해야 섬 하나가 만들어지는 걸까. 그는 이제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다. 오름이 되고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었다. 밤하늘 까만 별이 되어 섬을 내려다보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그를 만날지 모른다. 구름으로 바람으로 오름 정상에서 그의 민낯과 마주칠지 모른다. 평생 풍경 속에 자신을 내맡긴 사람. 이제는 풍경이 된 사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생을 살다 갔느냐 하는 것이다. 사진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몸조차 돌보지 못하면서 풍경에 일생을 바친 사람. 이제 풍경을 바라보는 눈빛이, 속도가 달라졌다면 당신은 이미 그를 만난 것이다.

글 김효선 시인  
사진 최용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