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일주버스 701번을 타고 가다가 삼달리에서 하차하면 중산간으로 향하는 길이 이어져 있습니다. 길을 따라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수 푸른 나뭇잎들의 그림자 사이로 5월의 햇살 흘러내리는 아침입니다. 중산간 버스는 배차 간격이 길어 망설이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까지 걷기로 합니다. 이따금 청량한 바람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어놓고 목덜미를 간질이고는 도망갑니다. 길 위의 나무 그림자와 햇살을 놀이처럼 번갈아 밟으며 향년 49세에 세상을 떠난 사진작가 김영갑을 생각합니다. 며칠 전, 그의 생전에 곁에서 함께했던 이재은 학예사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선생님은 작고하시기 전까지 사진만 생각하셨다’고 그를 회상했습니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 Ⓒ 김영갑
지금과 달리 제주도가 먼 섬으로 생각되던 1982년부터 사진작가 김영갑은 제주도와 육지를 오가며 사진 작업을 하다가 1985년에는 아예 섬에 정착합니다. 독학으로 사진을 배운 그는 제주도에 매혹되어 20년 동안 ‘삽시간의 황홀’을 낡은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제주도 곳곳의 해안, 오름, 들판 그리고 마라도까지 그의 두 발 닿지 않은 곳 없습니다.
손수 바느질해 지어 입은 옷을 걸치고, 제주의 중산간과 바닷가와 초원을 유령처럼 헤매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혀를 찼습니다. 제주 토박이들은 그에게 언제 떠날지를 묻곤 했고, 행색이 수상하고 궁색한 그에게 방을 내주는 것을 꺼리기도 했으며, 간첩으로 몰리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 가까운 지인들은 그를 한심하게 여기거나 걱정하는 한편 자유롭게 산다며 속 모르는 부러움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제주라는 섬에 홀로 기거하며 그는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고독의 삶을 택했습니다.
사진이 예술로 인정받기보다 추억의 기록일 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좋은 카메라만 있으면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편견 때문에 사진작가로 살아간다는 말은 풍류나 즐기는 철없는 떠돌이쯤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기에 밥 먹고 살려면 제주도로 신혼여행 온 사람들의 ‘찍사’ 노릇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외골수의 길을 갑니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 Ⓒ 김영갑
그의 바지 끝에는 눌어붙은 껌처럼 지독한 가난이 늘 따라붙었습니다. 끼니를 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촬영을 나가 만나게 되는 들판의 무나 당근으로 허기를 달래며,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 웅크리고 누워 난방도 하지 못하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생존의 도구는 의식주가 아니라 필름과 인화지였습니다. 물난리가 나서 살림이 모두 망가져도, 한여름의 지독한 곰팡이가 온 집안을 뒤덮어도 그에게 가장 먼저 구해야할 것은 필름이었습니다. 밥은 먹지 않아도 필름은 샀습니다. 필름이 떨어지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 맞이한 찰나의 아름다움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어 눈물 머금은 눈동자에 풍경을 담고 저린 마음 위에 인화했습니다.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1년에 한 번은 찾는 이가 없어도 사진전을 열었습니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 Ⓒ 김영갑
궁핍과 고독의 삶을 선택하게 하며 그를 이토록 홀린 제주의 바람, 바다, 들판, 햇살, 구름, 그리고 안개는 그에게 ‘오르가슴’을 선사하곤 했습니다. 대자연 앞에서 절정의 기쁨과 숨 막히는 흥분을 맞이했기에 그는 제주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가난했으나 가난하지 않았고 고독했으나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30kg이 넘는 카메라와 장비를 짊어지고 온 들판을 쏘다니며, 머릿속으로 상상해오던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해 질 무렵까지 한자리에 망부석처럼 서서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며, 몇 날 며칠을 같은 장소 같은 자리를 찾아 견딜 수 없이 강렬한 순간을 고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찰나를 완벽히 담아내지 못하면 1년을 다시 기다리면서도 그는 행복했습니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 Ⓒ 김영갑
그는 제주의 풍광을 사랑한 만큼 제주 토박이들의 거칠고 부족한 삶을 사랑했습니다. 집을 비워달라고 내쫓는 사람도 토박이였지만 먹거리를 가져다주며 걱정하는 사람도 토박이였습니다. 그는 유명한 예술가들보다는 제주도의 노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그들에게서 삶의 지혜를 얻곤 했습니다. 제주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니 풍경이 새로이 보였습니다. 눈 뜨고도 보지 못한 것들, 토박이들도 느끼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 섬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이 그에게는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 Ⓒ 김영갑
상상의 섬 이어도. 오랫동안 제주 사람들이 염원하던 이상향. 죽음에 맞닥뜨렸을 때에야 비로소 꿈처럼 펼쳐진다는 저승의 피안. 제주도 남쪽 바다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어져 온 정토의 섬이자 희망의 땅 이어도를 그는 기필코 보고 말았습니다.
“이십여 년 동안 사진에만 몰입하며 내가 발견한 것은 ‘이어도’다.
제주 사람들의 의식 저편에 존재하는 이어도를 나는 보았다.
제주 사람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나는 온몸으로 느꼈다.
호흡 곤란으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을 때 나는 이어도를 만나곤 한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저서-
2005년 5월 29일, 이어도를 만난 작가 김영갑은 루게릭병으로 투병생활을 한 지 6년 만에 육신의 옷을 벗고 영원한 피안의 섬으로 떠납니다.
투병 시절 김영갑 작가 모습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1999년 어느 날부터 노래를 부를 수 없었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는 손이 떨렸습니다. 수저를 들 수도, 옷의 단추를 잠글 수도 없었습니다. 몸의 근육이 퇴화해 카메라를 드는 것도, 사랑해 마지 않는 중산간을 누비는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루게릭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이제 사진을 찍지는 못하지만, 창고 가득 쌓인 작품들을 곰팡이로부터 구제하기 위해, 그리고 퇴화해가는 근육을 움직이기 위해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직접 제주도 성산읍 삼달리의 한 폐교를 갤러리로 개조하는 작업을 시작합니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 Ⓒ 김영갑
사람들은 치료에 전념하라며 만류했지만 그는 오래 비어있어 엉망이 된 작은 학교를 갤러리로 바꾸는 것에 몰입합니다. 마침내 2002년 여름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을 열었습니다. 두모악은 그가 자연 명상센터라고 여겼던 한라산의 옛 이름입니다. 침상에 누워 지내기 전까지 편치 않은 몸으로 직접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무성한 이파리들을 모두 벗어버린 겨울나무처럼 내 몸도 앙상하다.
그럼에도 절망하기보다는 편안하게 현실을 받아들인다.
몸은 부자유스러워도 정신만은 자유롭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저서-
‘언젠가 그 무거운 카메라와 장비를 지고 오름을 숱하게 오르는 게 힘들지 않으셨냐고 여쭈었더니 사진을 찍지 않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대답하셨다’는 이재은 학예사의 말이 문득 떠오릅니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정원 Ⓒ 문화포털 기자단 김채윤
그가 말 그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일구어낸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의 문 안으로 들어섭니다. 제주의 돌, 나무, 풀, 꽃, 그리고 작은 오름까지 모두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한 두모악의 정원에 찬란한 햇빛이 비추고 있습니다. 숲 속의 작은 오솔길 같은 길을 천천히 걸어봅니다.
미술관의 무인 찻집에서 그의 제자이자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을 지키는 사진작가 박훈일 관장님을 마주하고 앉았습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여쭐 것이 많았는데 미술관으로 걸어오며 아무 질문도 하지 않고 들려주시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박훈일 관장님이 까까머리 고등학생이던 19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영갑 작가가 제주의 동자석과 오름에 홀려 카메라를 들고 중산간을 헤매던 시절 박훈일 관장님의 아버지께서 그에게 방을 내어주면서 시작된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웃어른을 남녀 구분 없이 ‘삼춘’이라고 부릅니다. 박훈일 관장님은 처음에는 ‘선생님께서는’이라고 운을 뗐지만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삼춘’이라고 그를 호칭했습니다.
박훈일 관장이 촬영한 김영갑 작가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박훈일 관장님은 김영갑 작가를 ‘다정다감했지만 사진에 있어서만큼은 무척 엄한 분’이라고 회상했습니다. 배고프고 어렵던 시절 차를 타고 달리며 막막한 앞날에 어린아이처럼 엉엉 소리 내어 함께 울었던 이야기에는 같이 울고 싶었고, 사진을 가르치시며 잘한 것을 칭찬하기보다 실수한 것만 호되게 혼내 섭섭했던 대목에서는 같이 섭섭했습니다. 기업 차원이 아니라 개인의 사진 갤러리로 사립미술관 등록을 한 것은 대한민국 최초였다는 이야기에는 함께 뿌듯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박훈일 관장님의 눈가가 젖어들고 있었습니다. 항상 ‘삼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먼저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랬기에 운영이 어려웠던 시절에도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두모악의 문을 열고, 청소하고, 문을 닫는 지킴이일 뿐’이라고 말씀하신 박훈일 관장님은 마치 김영갑 작가가 곁에 있는 듯 ‘삼춘, 나 오늘 이거 할 꺼우다. 삼촌이 좀 도와줍서’라고 말하며 허공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의 외관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함께 하고 있는 스승과 제자이자 벗의 모습이었습니다. 서로에게 귀한 선물 같은 인연이라 여겨집니다. 그는 김영갑 작가의 새로운 사진을 자꾸 꺼내놓는 것보다 작품을 정리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하나 바로 서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며 ‘삼춘’이 바라는 것이리라 했습니다. 숨겨진 이야기와 아껴둔 작품들은 그 이후에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올 것입니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은 2006년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에 ‘잘 가꾼 자연 문화유산’에 선정되었고,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2015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대한민국 100대 관광지’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김영갑 작가는 떠났지만 그의 작품과 예술혼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두모악은 이렇게 단단하게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김영갑 작가의 작품 Ⓒ 김영갑
박훈일 관장님을 뒤로하고 미술관 정원을 지나 중산간 길을 걸어내려 가는 길에도 어김없이 바람이 붑니다.
“나는 그 심술궂은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은 멀리서 씨앗들을 한 웅큼씩 가져와 내게 잘 보이려 아양을 떤다.
나는 그 바람을 품에 안고 사시사철 함께 중산간 초원을 떠돈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저서-
생전에 제주도 안에서 이어도를 찾은 작가, 내가 있는 곳이 천국이라고 했던 작가 김영갑이 무거운 모든 것을 벗고 자유로운 바람으로 화하여 그만이 볼 수 있고 담아낼 수 있는 이곳 제주를 원 없이 풍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모악을 찾는 손님에게 그토록 베풀기를 좋아했다는 그가 따뜻한 바람 되어 두 어깨를 토닥이고 지나는 듯했습니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의 하날오름관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김영갑 작가가 별세한 지 올해로 10년입니다. 김영갑 추모 10주기 사진전 ‘오름’이 제주와 서울에서 열립니다. 5월 30일부터 12월 31일까지 제주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에서, 그리고 6월 27일부터 9월 22일까지는 서울 ‘아라아트센터’에서 ‘오름’을 주제로 각각 다른 작품이 전시됩니다.
그의 사진에는 제목이 없습니다. ‘감상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품 설명도 없습니다. ‘글로 설명할 수 없기에 사진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목도 설명도 없는 그의 사진 앞에 서서 그 풍경 넘어 가득 들어찬 이야기들을 마음으로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제주를 사랑해 사진으로 담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김영갑 작가가 기필코 만난 ‘이어도’의 품 안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김영갑 추모 10주기 사진전 ‘오름’ 안내
제주
- 전시기간 : 2015년 5월 30일(토)~12월 31일(목)
- 초대일시 : 2015년 5월 30일(토), 오후 3시
- 음악회 : 2015년 5월 30일(토), 오후 4시
- 장소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미술관(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로 137)
서울
- 전시기간 : 2015년 6월 27일(토)~9월 28일(월)
- 장소 : 아라아트센터(서울 종로구 인사동9길 26)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관람 안내
- 관람시간
1) 봄 [3월- 6월] 9:30~18:00
2) 여름 [7월- 8월] 9:30~19:00
3) 가을 [9월-10월] 9:30~18:00
4) 겨울 [11월- 2월] 9:30~17:00
(관람시간 30분 전 입장 마감)
- 휴관일 : 매주 수요일/설날․추석 당일
- 관람료
1) 어른 3,000원
2) 청소년, 제주도민, 군인 2,000원
3) 어린이, 경로(65세 이상) 1,000원
4) 7세미만, 국가유공자, 장애인 무료
- 주소 :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로 137
- 문의 : 064)784-9906
- 홈페이지 : http://dumoak.com
* 참고 자료
[도서]
-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김영갑, 하날오름, 1996
- <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 Human&Books, 2004
- <Wind... Field... Orum... Cloud 1957~2005>, 김영갑, 다빈치, 2006
- <김영갑, 김영갑 5주기를 추모하며>, 양인자 외, Human&Book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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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이어도]
‧작성자 : 문화포털 기자단 김채윤(글) / 장수영(편집)
‧출처 : 문화포털(문화공감) www.cultur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