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만나고 기억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초봄의 유채,한여름의 바다,늦가을 억새,겨울 한라산.그런데 혹시 '오름(기생화산)'에 올라본 적이 있는가. 섬전체에 산개한 360여개의 오름과 정면으로 마주친적이 없다면 당신은 아직 제주의 속살을 만져보지 못한 것이다. 오름이 없으면 제주도 없기 때문이다.
오름을 만나다
제주도에서 들은 우스갯소리 중 이런 게 있다. 성산포 사람들이 일출 한 번 못 보고 세상 뜨는 경우가 제일 많다고. 일출봉을 겨드랑이에 끼고 사는 탓에 하루 이틀 일출 구경을 미루다 그리됐다는 게 결론이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은 대개 사방 십 리 안에 다 있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무심할 수도 있다는 역설. 딱 내가 그랬다. 섬에서 나고 자랐지만 손톱만큼의 열정도 없이 사방 십 리를 대했던 탓에 오름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민둥산쯤으로 여겼다. 그런 오름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해준 건 ‘육지’ 출신의 어느 사진가였다.
10년 전, 스무 해 가깝게 오름 사진만 찍다 몇 해 전 루게릭 병으로 세상을 등진 사진가 김영갑을 만났을 때다. 만난 지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거두절미하고 오름을 향해 몸을 틀던 그의 동작이 하도 빨라 무슨 쿵후 스타를 만난 느낌이었다. 목적지는 용눈이 오름.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제주의 변화무쌍한 기후를 뚫고 촬영에 나섰던 그가 가장 사랑한 오름이었다. 마르지 않은 질퍽한 소똥에 질겁하고, 흰 컨버스화가 색색의 들꽃으로 물든 뒤에야 다다른 오름의 능선에서 사진가는 이렇게 말했다.
“새벽 네 시 반이면 잠에서 깬 뒤 곧장 오름을 향합니다. 제주의 오름은 파노라마 컷에 담겨야만 제대로 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촬영 포인트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발길 가는 대로 떠돕니다. 놀라운 건 제주의 오름과 평원이 보여 주는 천변만화의 풍경입니다. 거기에 제가 붙인 수식어 중 하나가 바로 ‘삽시간’입니다.”
단 하루의 오름 투어로 ‘삽시간’의 매력까지 챙길 순 없었지만 바람을 등지고 선 채 침이 마르도록 오름을 예찬했던 그의 진심은 아직까지 마음 한편에 똬리를 틀고 있다.
‘삽시간’이라는 스펙터클
2년 전, 섬 동쪽의 오름들을 더 아꼈던 그를 느닷없이 떠올린 건 공교롭게도 서쪽에 위치한 오름에서였다. ‘샛별’이라고도, ‘새별’이라고도 불리는 거대한 오름. 이른 새벽이었고, 제주의 특산물 중 하나인 ‘변덕스러운 날씨’가 활개를 치던 시각이었다. 오름을 향하던 일행 앞에 낯익은 복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개였다.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에 등장하는 안개쯤은 찜 쪄 먹고도 남을 만큼 짙은 안개였다. 물론 안개가 저격수처럼 일행을 노려도 오름에 이르는 길을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거대한 오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우리 일행이 맞닥뜨린 건 지워진 길뿐이었다. 있어야 할 지형지물은 온데간데없고, 주변은 점점 거칠어졌다. 몇몇은 아예 모습조차 지워지고 목소리로만 거리를 가늠해야 했다. 그때였다. 억새와 들꽃과 자갈로 뒤덮인 들판의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자잘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거친 태클만으로 점철됐던 대도시에서의 공적 스케줄들이 허공으로 솟았다가 안개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몇몇 이름 모를 벌레가 발자국 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하는 모습도 보였다. 는개가 그친 뒤의 찬 기운이 묘한 느낌으로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꿈에서 깬 듯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고작 10초쯤 압도적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오름은 바람이 몰고온 또 다른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축구 대표팀 전술 대형으로 흩어져 있던 일행 중 누군가의 장탄식이 새소리와 함께 들판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사진가 김영갑이 반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발음했던 ‘삽시간’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쉬움과 경이감을 동시에 안겨준 10초짜리 거대한 스펙터클, 그게 바로 ‘삽시간’의 정체였다.
중산간 지대의 타이틀 롤, 오름
한때 당대의 문학 담당 기자였던, 그러나 요즘엔 소설가로 문명을 떨치는 김훈의 기행 산문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사쿠라꽃 피면 쩔쩔맨다.” 잠시 빌려 말하면 난, 바람과 오름 앞에만 서면 쩔쩔맨다. 제주의 오름은 대부분 ‘섬의 속살’이라 불리는 중산간 지대에 포진해 있다. 한라산과 바다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이 지역은 바다와 억새와 돌담을 휘감던 바람이 미학적 차원의 길을 빚어 낸 곳이다.
지상 1만 피트, 아니 야트막한 오름에만 올라도 실핏줄 같은 길의 비주얼이 마음을 뒤척이게 만든다. 오름을 찾아 다니다 설령 이름 모를 중산간 도로로 접어든다 해도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쓸데없는 불안은 영혼만 잠식한다. 아담한 오름들을 부표 삼아 길을 내달리거나, 바다를 향해 조타를 틀면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된다. 바람에 홀려 길을 잃었다면 내친김에 마음까지 내던지면 그만이다.
웬만한 지도에는 기미조차 없는 ‘바람 길’을 누비다가 졸음이라도 밀려오면 녹슨 철망을 들추고 인적 드문 초원으로 스며든 뒤 잠을 청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안개와 비가 잦은 중산간의 특성에 의해 ‘삽시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오름을 목격할 수도 있다. 이때의 중산간은 누구도 재현할 길 없는 거대한 미스터리다.
오름은 그런 중산간 지대의 명실상부한 타이틀 롤이다. 오름의 존재만으로도 제주는 축복받았다. 제주를 훑어보기 위해 짜놓은 단순한 동선에서 벗어나 오름에 다가서는 순간 사람들은 섬의 물·공기·바람·흙이 빚어낸 기묘한 세계로 접어들게 된다.
오름은 풍경을 앞세운 텍스트에 불과했던 제주를 운명적 텍스트로 느끼게 한다. 섬 전체에 산개해 있는 360여 개의 오름이야말로 섬사람의 생활방식을 여실히 드러내는 아이콘이기 때문이다. 제주 바다가 섬사람의 자궁이라면, 오름은 탯줄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제주의 길 위에서 일회적인 시간과 공간을 연소의 재료로 삼아 셔터를 누른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관광 팸플릿 속에 드러누운 채 꼼짝하지 않는 상투적 이미지의 길들은 또 한번 그렇게 사진 속에 갇힌다. 거기엔 어떤 계절적 띄어쓰기도 없다. 입체적 장면의 분절도 없다.
만약 당신이 찍은 제주 길에서 바람이, 오름이 빠져 있다면 그건 난센스다. 그러니 어떠하신가. 억새와 오름이 리드미컬한 몸짓으로 ‘바람 타는 섬’의 진면목을 알려주는 가을의 한복판에서 조금은 색다른 섬 풍경을 챙겨 보는 건? 가령 시인 이성복이 묘사한 오름의 수많은 면모 중 하나라도 포착한다면? 그건 당신 역시 바람과 오름 앞에서 쩔쩔매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드러나고 또 숨으며 다열횡대로 물결치는 낮은 언덕들에서 문득 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은 횟집 수조 속에 꿈틀거리는 거뭇한 뱀장어들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또한 자맥질하는 검은 언덕들이 나란히 떼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해군에서 배를 탈 때 구룡포 앞바다에서 보았던 돌고래의 이동과 흡사해서, 무덤을 덮기 위한 잔디의 뗏장처럼 요동치는 바다 한 자락을 용접기로 절단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중에는 고대 왕릉처럼 높이 솟아오른 것들이 너럭바위 같은 평평한 언덕들 사이 더러 눈에 띄기도 해서, 선산 해평에서 도개 가는 길의 고분군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봉긋이 솟아오른 무덤들은 한결같이 젖가슴을 닮았으니, 아무래도 저것들은 벌거벗은 여자들이 다열횡대로 드러누워 풍욕하는 모습 같다. 그 젖무덤들이 탱탱하게 솟아올라 좀처럼 흘러내리지 않는 것을 보면 아직 남자를 모르는 앳된 처녀들의 것이려니 짐작할 수도 있겠다.”
-이성복 사진 에세이 『오름오르다』(현대문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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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고남수 1969년 제주 출생. 현재 제주관광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고 있으며 사진작업실 ‘꿈을 찍는 방’을 운영 중이다. 2001년 갤러리 룩스(서울)와 제주아트(제주)에서 ‘오름 오르다’로 개인전, 2003년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무빙 코리아 프로젝트(Moving Korea Project) ‘오름(Oreum)’전을 가졌으며 10여 차례 국내 그룹전에 참여했다. 시인 이성복의 사진 에세이 『오름오르다』(현대문학)에서 그의 오름 사진들을 더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