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사는 근위축증 사진작가 김영갑씨
제주에 가면 그를 한번 찾아가라고 권한 건 사진을 전공한 K선배다. 제주를 진정 알고 싶다면 어줍잖은 관광지나 헤매지 말고 그의 사진 갤러리에 들르라고 했다. 소주를 몇잔 들이켠 K선배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대한민국에서 사진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유일한 사람이다."
◇ '두모악'에서 - 그를 만나다 = 오늘이 다섯번째다. 날마다 그의 갤러리에 나왔다. 오늘따라 바람이 드세다. 갤러리 앞마당 억새의 몸부림이 힘에 겨워 보인다. 오늘도 그는 갤러리 입구 왼쪽 나무의자에 앉아 있다. 관광지도 한장 들고 갤러리를 찾아나선 첫날. 그건 필시 우연이었을 게다. 샛노란 감귤이 담장처럼 늘어선 성산읍 삼달리의 한 마을을 지나던 길이었다. 문득 손바닥 만한 문패가 자동차 백미러에 들어왔다. 분명 '김영갑 갤러리'라 쓰여 있었다.
"오고 싶은 사람만 오라고 이름표만 걸었지요. 한데 용케도 찾아오셨군요. 토박이도 한참을 헤매는데."
그는 말할 때마다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다. 말을 내뱉는 단순한 행동이 그에겐 버거운 노동이다. 궁금한 건 많지만 질문은 최대한 삼가야 한다.
갤러리는 1988년까지 초등학교였다. 폐교가 된 뒤론 동네 공터였다. 쓰레기 더미가 잔뜩 쌓인 이곳에 그가 갤러리를 짓겠다고 한 건 2년 전이다. 8개 교실을 뜯고 이어붙여 지난 4월 갤러리 문을 열었다. 운동장을 정원으로 가꾸는 일은 아직 진행 중이다.
갤러리에 머물수록 뜬금없이 섬뜩한 기운을 느낀다. 그의 몸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다. 벽마다 걸린 그의 사진에서도, 소품으로 갖다놓은 자갈 하나에서도 그의 숨결을 느낀다. 그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대(大)전시실 이름이 두모악이던데…."
"한라산의 옛 이름입니다. 탐라의 그대로를 담고 싶다는 뜻이죠."
"사진을 잘 몰라서요. 꼭 그림 같네요."
"사진과 그림은 같습니다. 화가의 인상이 캔버스에 옮겨지듯 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햇살과 바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다만 기다릴 수는 있습니다."
정확히 19년째다. 그가 제주에 틀어박힌 게. 찰나를 위해 살아온 '사진쟁이'다운 대답. 도인처럼 생긴 이가 도인처럼 말을 한다.
◇ 김영갑의 독백 1 -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 그 기자가 벌써 닷새째 찾아왔다. 두번째 왔을 때가 기억난다. 여길 추천한 선배가 담배나 사가라고 했는데 근처에서 가게를 못 찾았다며 다음날 담배를 사들고 나타났다. 그렇지. 여긴 구멍가게도 없는 동네지.
오늘도 '초콜릿 바'로 끼니를 때웠다. 지금 소망이 있다면 제대로 먹어보는 것. 하지만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소화는커녕 음식을 입으로 옮기기도 힘들다. 입과 턱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음식의 절반을 흘린다. 남에게 먹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 증세가 악화된 지금 여름부터다. 국물을 흘리는 꼴을 절대 보여줄 수 없다. 인간으로서 최소한 지키고 싶은 자존의 문제다. 악착같이 담배를 무는 것도 내가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다.
"수염이 잘 어울리네요."
기자가 인사말을 던진다. 수염이 벌써 그렇게 자랐나? 거울을 안 본지도 오래됐다. 남의 얼굴 같기 때문이다. 74㎏였던 몸무게가 지난 여름 47㎏가 된 뒤로 한번도 저울에 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면도를 해야 하는데. 지저분해 보이는 건 싫다.
돌이켜 보면 섬에 처음 왔을 때가 행복했다. 간사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간첩으로 몰리고, 들판의 당근으로 허기를 채웠어도 그땐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밤낮으로 섬을 헤집고 다녔어도 사진을 찍을 수 있어 행복했다.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살던 시절. 그때 난 행복했다.
그가 갤러리를 나선다. 서울로 돌아간단다. 날마다 들른 수고가 고마워 사진 포스터를 줬다. 무척 좋아한다. 처음 갤러리를 열었을 땐 그냥 나눠줬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 안 남았다. 정원 공사가 마무리되는 봄부턴 천원이라도 입장료를 받아야겠다.
◇ 서울에서 - 그의 흔적들 = 서울에 올라왔다. 돌아오자마자 김영갑의 흔적을 뒤졌다. 충남 부여생, 서울 한양공고 졸업. 82년부터 제주를 들락거리더니 85년 아예 정착했다. 독신. 12번 개인전을 열었지만 사진계에선 그리 대접받지 못했다. 사진을 전공한 적이 없다. 지난 2일 처음으로 상을 받았다. 이명동 사진상 특별상. 엄밀히 말해서 수상자는 인간 김영갑이 아니라 '김영갑 갤러리'다.
3년째 그대로인 홈페이지 두모악(www.dumoak.co.kr)도 찾았다. 3년 전이면 그가 루게릭 병 판정을 받은 이듬해다. 정식 병명은 근위축증. 근육이 사라지는 병이다. 병인도 치유책도 모른다. K선배를 만났다.
"사진을 어디서 배웠대?"
"월남 갔다온 형이 카메라를 가져왔대. 중학교 때. 그거 메고 혼자 다닌 거지. 그 뒤로 죽." "형제가 있는데 혼자 살아?"
"원래 6남매일 거야. 가족 얘긴 절대로 안해. 연을 끊었다더라. 나도 잘 몰라."
"그러다 덜컥 죽으면?"
"…."
그의 사진 에세이가 곧 출간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출판사에 전화를 했다. 육성 녹음한 걸 풀어냈다고 한다. 다음달이면 책이 나온단다. 초고를 보내왔다. 두모악에서 봤던 예의 그 독설이다. '중산간 들녘의 아름다움은 쉬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먼동이 트기 전 박명이나 땅거미와 함께 밀려오는 이내 속에 본디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대들이 보았다고 우기는, 겉으로 드러나는 오름의 부드러운 곡선이나 제법 풍만해 보이는 볼륨도 사실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도도한 오름이 일별하듯 휑하니 지나치는 이들에게 제 속살을 쉽게 내보일 리 만무다'.
◇ 김영갑의 독백 2 - 감나무 옆에 서 = 서울에서 열린 시상식엔 가지 못했다. 대신 몇몇이 안부 전화를 해왔다. "전화한 김에 돈이나 부쳐라"고 농을 쳤다. 인스턴트 죽 상자가 배달됐다.
갤러리를 찾는 이가 부쩍 늘었다. 지난 주말엔 관광버스가 왔다. 여태 몇몇이 띄엄띄엄 들렀을 뿐 단체 손님은 처음이다. "어느 서울 손님이 꼭 여길 와야 된다고 우겨서." 가이드가 울상이다. 관광지도 아니고 돈도 안되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지난 여름엔 필름 7만장을 모두 태워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살고 싶다. 아니 살아야 한다. '길어야 4년'이라던 의사의 판정은 무의미하다. 사형 선고를 내린 건 내가 아니다. 내가 내린 내 삶의 시한은 아직 멀다. 감나무로 다가갔다. 갤러리 오른편의 감나무를 지켜보는 건 요즘 소중한 일과다. 벼락맞아 시커먼 밑둥만 남아 버려진 걸 동네 저 편에서 옮겨 심었다. 그리고 지금. 그 밑둥에서 새파란 싹이 돋아나고 있다. 동네에선 기적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에겐 아니다. 꽃이 피고 감이 열릴 때까진 아직 멀었다.
제주=손민호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