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아우름 160호(한국방송통신전파진흥원) 2011/05+06월]

[따뜻한 우리 사이 | 마음먹고 찍은 쉼표] 제주김영갑갤러리두모악-셔터소리 멈춘 자리, 아릿한 감동이 피어나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내다본 경이로운 제주의 자연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와 더는 그 황홀하고도 신비로운 풍경을 담아낼 이가 없다는 슬픔이 공존하고 있는 곳. 제주의 속살을 고스란히 담아낸 ‘김영갑갤러리 두모악’의 정문을 들어선다. 유명 관광지에서라면 꼭 빠지지 않고 찾을 수 있는 여느 지역 갤러리마냥 주인장의 취향을 담은 그림 혹은 사진 몇 점 걸려 있을 것이 뻔해서 고상한 척 폼 잡으며 그저 여행의 노고나 잠시 내려놓고 보리라 생각했다. 그 안에서야 비로소 가장 제주다운 제주를 만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당신은제주를아십니까?
‘제주’ 하면 마치 조건반사처럼 튀어나오는 단어, 돌과 바람. 하지만 그것이 제주의 전부라 하는 사람들은 제주가 가진 그 한없는 깊이를 모른다. 돌고샅 한 굽이만 돌아서면 숱한 사연 간직한 오름이 이어지고, 도로에서 한 발자국만 벗어나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비경이 나타난다는 것을. 게다가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어느 한순간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 적이 없다. 어떤 길은 하늘에 가 닿고, 어떤 길은 바다로 향하고, 또 어떤 길은 초록 그대로의 터널이 되니 설사 같은 길이라 하더라도 지날 때마다 늘 새롭다. 바다는 바다대로, 뭍은 뭍대로 봄·여름·가을·겨울이 모두 다른 것이다.
이런 제주의 변화무쌍한 아름다움을 가장 오래, 가장 깊이 바라본 이가 바로 사진작가 김영갑이다.
그렇기 때문에 20년의 세월 동안 고집스레 제주의 모습을 담아온 그의 사진은 우연히 마주한 가슴 찡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누구보다제주를잘아는, 제주에미친사진가
사진가 김영갑은 1985년 제주도에 정착해 2005년 루게릭병으로 사망하기까지 20년 간 오직 제주도만을 찍다가 간 사람이다. 시시각각 황홀하게 피어오르는 구름, 원시적 안개 속에 잠긴 오름, 새벽녘 들판에 오롯이 선 나무 한 그루, 거친 바람에 뒤척이는 억새, 분노하는 바다 등 제주 사람들도 모르는 제주도의 순간들을 자신의 셔터 속에 담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제주도의 산과 들, 바다를 찾았던 그다.
 
하지만 신은 제주의 모든 아름다움을 독차지하는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제주도에 ‘미친’ 지 14년. 더 이상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못하게 됐다. 10만 명 중 1~2명에 찾아온다는 루게릭병이 하필 그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근육은 점점 녹아내렸고, 인간으로서는 견디지 못할 무서운 통증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눈 속에 넣어 두었던 제주를 이제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아두기 위한 생의 마지막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것이 2001년이다.

 

 


생의마지막프로젝트, 두모악
그는 성산읍 삼달리의 폐교를 장기 임대해 사진 갤러리로 개조했다.
숟가락조차 들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마치 자신의 숙명을 다하듯 꾀 한번 부리는 일 없이 공사현장을 지켰다. 그리고 그것은 김영갑과 생전 ‘스승과 제자’이자 ‘친구’, ‘가족’으로서 동고동락했던 박훈일 관장이 지금 생각하기에도 기적에 가까웠다.
“처음 한 작업이 폐교 운동장을 정원으로 만드는 일이었는데, 삼촌(그는 김영갑을 이렇게 불렀다)은 당신의 주 작업무대인 중산간을 표현
하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까지 그 지역에 서식하는 것으로 꾸몄죠. 그런데 그 작업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챙기
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나무는 무려 10번도 넘게 그 자리를 옮겨심기도 했어요. 정작 본인은 숨 쉬는 것도 버거워하면서 말이죠.”
그리고 3년 뒤 김영갑은 그토록 소망했던 두모악 갤러리에서 마지막 육체의 끈을 놓았고, 그의 한 줌 뼈는 갤러리 마당에 뿌려졌다.

 

눈이호강하고,  마음이새로워지는갤러리
김영갑 갤러리에 들어서면 바람 냄새가 난다. 휘몰아치는 구름이 범상치 않다. 중산간 오름과 들녘의 풍경은 그림보다 아름답다. 너무도 아름다워 전혀 이 세상 같지가 않다. 사진 속 구름이나 바람의 색깔은 감히 인간이 흉내 낼 것들이 아니다. 소재는 오름이고, 주제는 바람과 구름들뿐이다.
전시관 내에는 이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그저 그 앞에 ‘구름이 내게 가져다준 행복’과 ‘용눈이 오름-바람에 실려 오는 이야기들’이라는 제목만이 여기에 어떠한 사진들이 놓여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대자연의 경의에 구태여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터다.


그래서일까. 여기에서는 소소한 풍경을 담은 사진에도 가슴이 벅차 온다. 그저 야트막한 언덕 양쪽에 소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는 그곳에서 구름의 변화를 여러 장에 담아냈을 뿐이지만, 김영갑 그 사람이 얼마나 매일매일을 감탄하며 살았을까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도 나무도 바람도 천둥도 조금 전의 것이 아니고, 어제의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우리의 삶이 또 한 번 새로워짐을 비로소 알게 된 까닭이다.

 


“유명 관광지보다는 의미 있는 갤러리로 남고 싶어요”
부지면적 1만 3,223㎡(4,000평), 전시공간 992㎡(300평), 매회 작품 100여 점 순환 전시되는 김영갑 갤러리는 일반 우리가 생각하는 곳과는 조금 다르다. 여느 갤러리처럼 소위 돈 되는(?) 기획 전시나 행사 스케줄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그저 전시실에는 처음 갤러리가 오픈했을 때부터 그랬듯 사진작가 김영갑의 작품만이 묵묵히 걸려 있을 뿐이다. 애초부터 갤러리 운영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란다.
“사실 갤러리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처음에는 갤러리를 맡기보다는 삼촌 작품 보존에만 관심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제가 갤러리를 운영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왕 하는 거 오랫동안 사람들이 감동이 계속되는 갤러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냥 이름만 유명한 관광명소가 아니라 작가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고, 찾는 사람 모두가 안식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공간이요.”
그런 그의 마음이 전해져서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동이 전해지면서 지난해 7만 명의 여행객이 이곳을 찾았고, 요즘에도 하루 평균 200여 명이 김영갑 갤러리를 방문하고 있다.
“그동안의 삼촌은 몸이 아픈 와중에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인물로 알려졌었다면, 이제는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풍경 사진을 통해 제주의 삶 그대로를 보여주는 작업을 하신 분이니까요.
그리고 저 또한 한 사람의 사진가인 만큼 두모악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들을 만들어내려 노력해야죠.”


글 김민정, 사진 이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