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세계일보 2007/05/17] [작가 임동헌의 우리 땅 우리 숨결] 제주 두모악 갤러리

◇김영갑씨가 투병할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 김영갑씨는 감나무 아래에서 숨 쉬고 있지만 그를 대신한 조각은 사계절 내내 지상에서 사람들을 맞는다. 
 
"선생님은 저기서 쉬고 계세요”

 

한라산 자락 아래, 폐교된 초등학교가 전시 공간으로 변신한 두모악 갤러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다. 사진작가 김영갑의 영혼이 서린 곳이기 때문이다. 그 갤러리 건물의 뒤쪽에 항아리와 카메라 모습이 보인다. 사진 찍는 사람은 간 데 없고, 삼각대에 카메라만 덜렁 얹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어떤 이는 대패질을 하고, 어떤 이는 망치질을 하고 있다. 목소리들이 정겹다. 알고 보니 항아리들 앞에 세워 놓은 카메라는 두모악지기를 맡고 있는 박훈일 관장의 것이란다.
제주도 성산읍 삼달리, 섭지코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두모악갤러리에 들어서면 일순 모든 긴장이 스르르 풀린다. 제주의 산과 바다와 밭을 축소해 놓은 듯한 운동장은 이름 그대로 제주도 미니어처에 가깝지만 소꿉처럼 귀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공간을 만든 사진작가 김영갑은 2년 전 이맘때(5월29일), 나이 50이 되기도 전에 나비처럼 가벼운 몸이 되어 이 땅을 떠났다. 온몸의 근육이 삭아 없어져 카메라를 들 힘조차 없게 되는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일명 루게릭병)과 싸우다 영면한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두모악 갤러리는 김영갑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은 채 여전히 우리에게 제주의 아우라를 전해 주는 장소로 좌정해 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5개월 정도 함께 일했는데 지금도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안타까움을 안은 채 턱을 손으로 괴고 있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1년 동안 일본에 나가 있었는데, 이 공간을 잊을 수 없어 다시 돌아와 갤러리 일을 보고 있어요.”

 

스님처럼 머리를 빡빡 깎은 학예사 이재은(31)씨가 갤러리 밖으로 나오더니 ‘선생님은 저기서 쉬고 계세요’라며 연민 어린 표정을 짓는다. 세상 어떤 갤러리의 직원보다 친절한데, 가식적인 느낌은 전혀 없다. 어떤 점에서는 사진작가 김영갑이 몇m 앞쯤에서 실제로 쉬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자그마한 키의 감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그 옆에 토우 한 점이 서 있다. 카메라를 들 힘도 없고, 스스로 목을 가눌 힘도 없어 손으로 턱을 받치고 견뎠다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이다.

 


◇사진 작가 김영갑씨가 생전에 폐교 운동장에 가꾼 두모악 갤러리의 제주도 상징소들. 오름, 한라산, 나무와 꽃들의 모습에서는 인위적인 느낌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다. (왼쪽)
◇나무와 돌에 둘러싸인 두모악 갤러리 입구. 학교 교사의 외형을 거의 변화시키지 않아 더욱 자연친화적인 멋을 풍긴다.

 

“그러니까 수목장을 하셨다는 얘기죠?”

 

문득, 사진 작품만 보았지 그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두모악갤러리를 찾았다는 게 안타까워진다. 사진 작업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 번 대면할 기회가 있겠거니 여겼는데, 그는 홀씨처럼 날아가 버렸으니 통성명할 기회란 다시 없는 것이다.

 

김영갑이 누구인가. 그는 고향 부여를 떠나 제주 땅을 밟은 이후 제주의 바람과 바다와 산에 취해 제주도 사진만을 찍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제주를 사랑한 사람이다. 섬이 좁다고는 하나 비바람 고스란히 맞으며 제주 전역을 누비고 다닌 까닭에 작곡가 김희갑 양인자 부부는 자동차 한 대를 선물하면서 딱 한마디 했다고 하지 않는가.

 

“사진 찍는 것도 힘든데 비 맞고 다니지 마라.”

 

김영갑은 사진관을 하는 친구 아버지 때문에 사진에 입문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한양공고를 졸업한 후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형이 카메라를 선물하자 그것을 들고 친구 아버지의 사진관에 찾아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사진을 배운 독학파였던 것이다. 필자 역시 그와 유사한 기억을 갖고 있으니, 필자는 소풍 날이 되면 사진관을 하는 동네 형의 비윗장을 맞춰가면서 카메라를 빌려온 후 며칠 동안 반납을 안 하고 속을 썩인 기억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윗길이다. 동네 사진관 주인에게 카메라를 빌리기는 했지만 사진 잘 찍는 비결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고 어깨너머로 구경도 하지 않고 독학했기 때문이다. 아니다. 김영갑이 윗길이다. 김영갑은 마음에 드는 피사체가 발견되면 스스로 몸을 묶고 절벽에 매달려 셔터를 눌렀고, 그렇게 해서 얻은 필름이 30만 장에 이른다. 필자는 낯선 거리에서 험악한 사람들과 대거리를 한 적은 있으나 쓸모없는 필름까지 합해도 30만 장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김영갑씨의 영혼이 쉬고 있는 감나무 주변. 갤러리 바로 앞에 자리해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잠시 숙연한 느낌에 젖어들곤 한다. (왼쪽)
◇두모악갤러리는 폐교된 ‘삼달국민학교’를 임대해 전시 공간으로 만든 제주도의 문화 공간이다. 사진 작가 김영갑씨는 부여 출신이지만 오직 제주도 사진만 찍었다.

 

갤러리 옥상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을 딛는다. 여기저기 널빤지가 삭아 자칫하면 발목이 낄 것 같은데, 막상 오르고 보니 거기에 제주의 모든 것이 있다. 오름, 묘, 때죽나무, 한라산, 현무암, 해녀들의 걸망이 운동장 전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사진에 국한하지 않고, 제주의 모든 형상을 자신의 삶터에 가꾸고자 했던 김영갑의 모습이 눈에 잡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럭셔리한 갤러리를 만들어 수입을 늘려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전시실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하지만 식물원이기도 하고, 조각 전시장이기도 한 학교 운동장에 들어서는 것은 무료인 것이다. 그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했던 것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소꿉장난하듯이 갤러리를 운영했던 것뿐이다. 그래서 두모악갤러리에서는 자본의 냄새 대신 환경 친화적 요소만 가득하다.

 

“제주도 바람이란 게 참 묘하거든요. 가슴을 싸악 훑어 내리는 그런 뭐가 있으니까요. 김영갑 선생님도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저도 그래요. 그래서 다시 돌아왔구요.”

 

이재은씨가 제스처까지 써가며 가슴을 훑어 내는 제주 바람을 표현하려 애쓴다. 어김없는 동심이다. 생전의 김영갑과 함께 두모악갤러리를 꾸며온 이재은씨는 박훈일씨와 함께 김영갑 2주기 추모전을 준비 중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의 끝자락에서 10월까지 제주 산하의 아름다움을 빛낸 사진들로 섬사람들과 뭍사람들의 마음을 적시려는 것이다. 하지만 걱정이 태산이다. 입장료로는 교육청에 내야 할 임대료며 인건비 대기도 빠듯하니 전시회 준비라고 해서 순탄할 리 없다.

 

이재은씨는 관람객 안내를 위해 전시실로 돌아가고, 현무암과 꽃나무들로 가득한 운동장을 서성여 본다. 도 닦는 마음으로 10년만 살아보자고 제주 땅을 밟았던 사내가 20년 이상 제주의 바람 곁에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생전에 “나는 제주의 자연을 더 멋지게 보이려고 이미지를 가공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제주의 본질을 보여 주고 싶었으나 그 본질은 내 카메라가 담아내기 전에 훌쩍 날아가 버리곤 했다”고 자신의 사진에 대해 겸양했다. 그러면서 이 남자는 제주의 황홀한 순간을 맞을 수만 있다면 간장 고추장 된장에 밥 한 술 먹으면 될 뿐이라면서도 죽을 때가 되면 필름을 모두 불태우겠다고 호언했었다.

 


◇두모악갤러리 앞바다에서 물질에 나선 해녀. 불가해한 생활력으로 집안을 이끌어온 해녀들은 막상 자식 세대에는 물질을 물려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나는 김영갑의 사진은 그 사투의 결과물로 탄생한 것인데, 그러니 더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무엇보다도, 그는 영영 떠나지 않은 채 자신이 만든 갤러리의 한쪽, 감나무 밑에서 사람들의 발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말이다. 그에게서 사진을 배웠던 박훈일 원장이 갤러리두모악을 지키고 있고, 이재은씨 역시 일본에서 돌아와 김영갑의 향기를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까지 퍼뜨리고 있으니 말이다.

 

두모악, 설악산의 옛 이름에서 지금 김영갑의 사진이 다시 살아난다. 잘들 있었어? 비 맞고 다니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자동차를 선물 받았던 그가 이제는 비 몇 모금에도 몸이 젖는 감나무 아래 잠들어 있다. 하지만 그는 곧이라도 몸을 일으켜 카메라를 들고 갤러리 밖으로 나설 것 같다. 그는, 살아 있다.

 

임동헌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