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폐교갤러리 연 루게릭병 김영갑씨
사람들은 절망을 배우러 제주의 남쪽, 옛 삼달리 초등학교에 간다. ‘김영갑 갤러리’로
바뀐 이곳에 아이의 무동을 태우고 혹은 연인과 손잡고 오는 사람들은 사진만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다. 이정표도 없는 산간마을 폐교를 찾아드는 사람들은 이 학교에서 고달픈
인생의 스승을 찾는다.
최근 김영갑(48)씨가 낸 사진 에세이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앤북스)를 내밀며
사인을 받거나 악수라도 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김씨에게서 휠체어를 탄 채 왼손가락
두 개로 물리학 세계를 움직이는 스티븐 호킹이라도 연상하는 것일까. “내겐 이 운동장이
필름이에요. 셔터만 못 누를 뿐 끝없이 찍고 있는 셈이지요.”루게릭병으로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사진작가가 자신이 조경한 갤러리 정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기처럼 고개에 힘이 없어 인터뷰 내내 손가락으로 얼굴을 받치고서도 목소리만은 또렷하다.
숨쉬고 말하는 일조차 이를 악물어야 가능하지만 그는 절대 멈추지 않았다. “하루 일과 중
가장 힘든 게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연과 석고처럼 굳어져가는 내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죠.
눈감으면 제주도 전역이 펼쳐지는데, 그곳으로 걸어가 셔터를 누를 수 없다는 절망감을
생각해보세요.”
한번 입은 셔츠를 갈아입을 힘이 없어 열흘간 그대로 입고 잘 때도, 숟가락질조차 안 돼
밥알을 죄다 흘릴 때의 절망감도 그에 미치진 못한다.
그런 그가 3년간 마당에 100그루가 넘는 나무를 심고 제주의 돌과 흙과 바람을 옮겨다
놓았다. 손이 마비된 사진작가는 그렇게 인부들을 지휘해 너른 운동장에 입체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제주의 자연을 찍는 일에만 20년 몰두했다. 그러다 병 걸릴 만하다 싶게 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제주도를 이곳에 옮겨놓겠다”고 했다.
갤러리로 진입하는 운동장에 그는 감나무 대추나무 목련 무화과 억새 대나무 등을 심었다.
바람에 흔들림이 적은 수종은 심지 않았다. 제주의 바람을 느끼라는 뜻에서다. 거친 바람에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 나무들은 제주를, 그리고 이 집의 주인을 빼닮았다. 루게릭병이 발병한
지 벌써 5년째. 발병 후 2년이 넘으면 운신도, 말 한 마디도 못하고 곧 죽을 ‘환자’가
되지만 그는 말하고 움직인다. 힘들게 그리고 천천히.
“기적은 가만히 있다고 오는 게 아니죠. 내가 어차피 죽는다면 희망 찾아 보내도 24시간,
절망에 빠져 보내도 24시간은 흘러가잖아요. 전장에서도 살려고 발버둥치면 죽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아남지 않습니까.”
3년간 그의 몸에서는 30kg의 살이 빠져나갔다. 미라의 것처럼 소매 속 팔이 허랑히 움직인다.
3년 전 기자와 만났을 때의 도도한 눈빛과 폐부를 찌르는 독설은 여전했으나 득도한 이의
온기가 마치 후광처럼 감싸고 있었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폐교를 찾아와도 밤이면 홀로 고통에 치를 떨며 잠들죠. 밭에서 몰래
당근을 캐먹던 옛날보다 돈은 많아졌어도 지금 먹을 수 있는 것은 죽밖에 없군요. 하지만
마음이 지금처럼 평화로운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욕망도 허용되지 않는 육신 때문이죠.”
보고 싶은 이에게 갈 수도, 보고 싶은 이가 찾아온대도 밥 한 끼 같이 먹을 수 없는 육체의 감옥.
그 속에서 김씨는 비관적 이성과 낙관적 의지의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간병인을 두기는
커녕 그는 매일 밥 먹고 옷 갈아입는 ‘투쟁’을 홀로 벌인다. “도와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면
스스로 힘들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마비가 심화됩니다. 그래서 못하면 못했지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해요. 힘들어도 누가 내 삶을 대신 해주지 못하니까요.”
그가 평생을 박혀 찍어낸 제주의 사진은 10만여 점. 그 일부가 걸린 갤러리 안을 거닐어 본다.
바람이 훑고 가는 시간의 흔적이 액자 속에서 펼쳐진다. 그의 사진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의 사진 속에서는 바람이 흔들리고 눈 내리는 풍경이 보인다. 그다음엔 그
앞에 서 있었을 한 사람, 그 자리에 서서 돌처럼 굳어져가는 김영갑씨가 보이는 까닭이다.
지금 이곳에는 폐교가 갤러리로 생명을 얻듯, 갤러리의 주인이 건강한 육신을 얻길 바라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제주-김은진기자 jisland@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