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제주여! 내몸은 가도 너는 영원하리
"철창에 갇힌 내가 육체의 감옥에 갇힌 당신을 보며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쾌유를 빕니다.”
폐교가 된 지 16년이나 지난 남제주군 표선면 삼달리 초등학교에는 요즘 수북한 편지들이
배달된다. 발신인 중에는 전국의 교도소 수감자들도 있다.“선생님을 꼭 뵙고 싶은데요.” 지난 1일 전주에서 왔다는 일가족은 선생님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학생도 교사도 오래 전 떠나간 폐교에서 이들은 어느 선생님을 찾는
것일까. 주인공은 지난 20년간 제주도 사진만 찍다 ‘루게릭병’을 얻은 사진작가 김영갑(48)씨.
근육신경이 마비돼 점점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근위축증(ASL)으로 3∼5년 시한부 생을
선고받은 그가 자신의 남은 숨을 쓰레기더미 폐교 위에 불어넣고 있다.
‘김영갑 갤러리’라는 문패를 내건 학교가 다시 문 연 지 3년. 평일 40∼50명, 주말 400∼500명의
방문객이 다녀가고 있다. 식당이나 구멍가게 하나 찾을 수 없는 전형적인 중산간 마을 폐교가
제주 문화의 허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서귀포시에서 성산으로 가는 16번 국도를 타고 달려야
도달하는 곳.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난 촌로 부부에게 김영갑 갤러리를 묻자 그들은
기자를 경운기에 태웠다. 노부부는 ‘가족들과 벌써 다녀왔다’며 자랑스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육지에서 부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 달망(같더라)”이라고도 했다.
20년 전 간첩이라 신고받으며 사진을 찍던 도시 총각이 제주의 명물로, 살아 있는 신화로
자리잡은 건 폐교에 남은 목숨을 걸면서였다. 음산한 폐교 건물의 8개 교실을 뜯고 이어붙여
자신이 20년간 찍은 제주의 사진들을 걸었다. 폐허가 됐던 운동장은 제주도를 축소한 비밀의
정원으로 바뀌었다. 흑갈색 돌담과 오솔길이 에돌아 있고, 오름과 현무암, 감나무와 유채꽃이
자란다. 3년 전만 해도 몽상에 불과했던 이야기다. 병든 그가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한 폐교에
갤러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3월 ‘김영갑 갤러리’ 인근의 옛 가시초등학교에 뒤따라 또 하나의 제주 사진전문 갤러리가
들어설 정도가 됐다. 한국에 몇 안 되는 사진전문 갤러리가 제주도 산골마을에만 두 곳. 제주도 속의
제주로 거듭나고 있다. 2004년 현재 농어촌 지역 소규모 학교 통폐합 과정에서 폐교 된 학교 시설 중
여의도 면적의 2배에 가까운 400여 곳이 방치되고 있는 현실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김영갑씨는 오늘도
운동장에 나무를 심는 공사를 진행 중이다. 벌써 100그루가 넘는다. 바람에 몸을 뒤트는 제주의 나무와
풀들은 그의 사진 안팎에서 자라고있다. 자신이 찍은 순간의 황홀을 거꾸로 현실로 만들고 있는 셈이다.
삼달리 초등학교를 찾는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는 건 나무가 아닌지 모른다. 말라비틀어져 가는 몸으로
나무를 심은 사람. 그를 통해서 폐교들은 전국 각지에서 온 가족이 찾아오는 제2의 학교로 부활하고 있다.
글·사진 김은진기자/jisland@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