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스포츠서울 2004/03/12] 제주 성산에서 만난 사람 사진작가 김영갑

제주 성산에서 만난 사람 사진작가 김영갑

 

성산읍 삼달리에 발을 내딛는 순간 가슴이 떨렸다. 조용한 폐분교의 운동장에는 엄청나게 많은 현무암이

산처럼 쌓여 있고 온몸이 뒤틀린 나무들로 가득 차 있다. 운동장을 지나 갤러리에 들어섰을 때 철저하게

고독감으로 무장한 갤러리 오너 김영갑씨(48)가 밝게 눈인사를 건넸다. 회색빛 옷과 모자를 눌러쓴

김씨의 첫인상은 굉장히 밝고 혈색도 좋아 보였다. 지난 1월 사진집 그 섬에 내가 있었네출간을 계기로

세상 사람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사진작가 김영갑씨. 19852월 제주도에 와 애써 사람들을 등지고 뼈에

사뭇칠 정도로 외로움을 찾아 헤맨 사진장이. 청춘을 다 바쳐 오로지 제주의 이미지를 작은 카메라

앵글에 담으려 정처 없이 바람처럼 흘러다녔다. 5년 전 갑자기 찾아 든 불치병인 루게리그병(근육이

위축되는 병)’은 그를 더욱 고립시켰지만 의연한 마음으로 몸과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면서 폐교인 삼달

초등학교를 사진 갤러리로 만들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 난치병으로 인해 더 이상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지만 남은 인생 동안 최선을 다해 신이 준 생명을 소중히 키워가고 있다.

 

쓸쓸히 버려진 폐분교가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로 변신한 것은 지난 200271. 생명의 시작도

혼자요, 끝도 혼자라 생각해 결혼도 하지 않고 고독과 살고 있는 김씨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몰입한

사진’.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 온 청천벽력 같은 병으로 인해 카메라를 놓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던

그는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는 새로운 삶의 희망을 꽃 피우기 위해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다. 기자가 다가가자 인터뷰 사진은 찍지 않습니다라고 첫마디를 건네는 그의

모습에서 이 같은 고독감은 더욱 짙게 배어 있었다.

 

생명을 다스리는 땅제주도

 

김영갑씨의 첫인상은 병마와 씨름하는 환자의 모습보다는 지독한 고독에 휩싸인 사진장이의 모습

그자체였다. 건강상태가 궁금한 것도 그래서였다. 현재 두 팔이 거의 마비돼 목도리조차 혼자서 착용

하지 못하지만 의식만은 또렷했다. 병원에 가지 않고 약물치료도 전혀 하지 않으며 자연의 일부가 돼

자연인으로 사는 그의 모습은 경이로움 그대로였다. 왜 치료를 받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연 속에는 모든 생명을 치유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으며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다시 물었다. 20년 넘게 제주도를 사랑한 이유가 뭔지를. “일반인들은 제주도를 여행지로만 생각하지만

저는 마음의 평온함을 얻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 여깁니다. 특히 섬의 특성상 제주는

고독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 이면에는 홀로 있을 때만이 느끼는 여유와 고요함도 함께 지녀 정말 좋아

합니다.”

 

가쁜 숨을 몰아 쉰 김씨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주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세찬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며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제주인이 있어 이 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 속에서 만난 제주도의 바람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동안 그는 미친 사람처럼 한라산 기슭을 헤매며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바람을

표현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의 전시실에 걸려 있는 작품들 속에는 제주만이 가진 다양한 바람의

색깔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품고 있던 질문(바람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을 던졌다.

 

자신을 키운 것이 바람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주의 바람은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사계절 각기

다른 색깔입니다. 마음이 슬플 때는 눈물을 머금은 바람이 불고, 기쁠 때는 웃음을 담은 바람이 산에서

불어오고, 외로울 때는 가족과 친구의 사랑을 품은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 옵니다.” 바람을 좋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는 얘기다.

 

운동장에 새로운 제주의 이미지를 넣고 있는 사진장이 김영갑씨

 

그동안 모두 16차례의 전시회를 꾸몄지만 더 이상 작품활동이 불가능한 그는 요즘 운동장을 필름 삼아

새로운 창작활동에 몰입 중이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주어진 삶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봄날에 흩날리는 유채꽃보다 아름다웠다.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들 수 없다는

것은 생명력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람처럼 강한 에너지를 지닌 그는 새로운 인생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몸도 불편한데 운동장에 무엇을 표현하려고 애를 쓰느냐고 물었다.

 

그는 사진 속에 바람을 담았듯이 운동장에도 제주의 바람을 담으려고 합니다고 했다. 의외로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무들은 세찬 바람에 시달린 것처럼 모두 휘어져 있고, 돌 또한 바람에 깊은

상처를 입은 듯 여기저기 마구 흩어져 있다.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줄 아는 생명은 더욱 자기 몫의 삶에 충실하고, 만 가지 생명이 씨줄과 날줄로

어우러진 세상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라고 그는 저서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 적었다. 정말이지 그는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이 시대의 진정한 사진장이다. 병이 그의 육체를 고통 속으로 밀어넣고 있지만

바람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그럴수록 꿋꿋하게 일어나 제주 곳곳을 구름처럼 떠돌아다닐 것이다.

 

가는 길=성산에서 12번국도를 타고 표선 방향으로 9가면 삼달리와 삼달 2리로 가는 표지판이

나온다. 삼달리 방면으로 우회전해서 조금 올라가면 삼달초등학교를 개조한 김영갑 갤러리가 있다.

(064)784-9907

 

·사진 이태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