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한겨레신문 2004/02/08] 루게릭병 앓는 제주도 사진작가 김영갑씨

절망의 끝 서니 제주가 보이더군요

[한겨레] 루게릭병 앓는 제주도 사진작가 김영갑씨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섬에서 나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풍경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내 사진에 표현하고 싶은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20여년 전부터 제주에 내려와 그림처럼 아름답고 정겨운 제주의 자연을 고집스레 찍어온

사진작가 김영갑(48·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씨가 제주도에서의 삶과 사진 예술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들을 담은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 앤드 북스)를 펴냈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그의 갤러리에 들어서면 제주의 바람을 느낀다.

갤러리 정원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오랜 바람결에 누웠음직한 팽나무와 올래(제주의 전통적인

마을 좁은 길), 돌 그리고 사람이 있다.

 

근육이 위축되는 불치병인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작품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 그의 갤러리에는

제주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제주도를 떠나지 못하게 한 매력을 옮겨 심으려고 노력했다는 그는 땅이 필름이라면, 나는

그 위에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라며 갤러리 정원을 이야기했다.

 

19852월 제주에 정착한 그는 오직 제주의 자연을 찍는데 모든 열정을 바쳤다고 한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무,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제주 땅에 살면서 대했던 자연과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이번 책에서 그는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력한 그 순간을 위해 같은 장소를 헤아릴 수 없이 찾아가고

또 기다렸다고 자신의 예술적 영감과 작품에 대한 처절하기까지 한 집념을 표현했다.

 

그러던 그가 4년 전 자다보면 다리에 쥐가 나고 손이 떨리며 마비 증세를 보이는 게 이상해

서울에서 병원 검진을 받은 결과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을 오래하면 혀가 굳어져 말을 하지 못하는 그는 전화를 받거나 간단한 물건을 들 때라도 두 손을

곧추 잡아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치료를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름다움이 영혼을 구원해주듯이 자연에도 병에

대한 치유능력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예전에는 제주도를 절망의 땅이라고 했잖아요. 절망의 끝에 서니까 제주도를 들여다 볼 수 있고,

제주 토박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제주사람을 찍고 싶어요.”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