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끝 서니 제주가 보이더군요”
[한겨레] 루게릭병 앓는 제주도 사진작가 김영갑씨
“제주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섬에서 나만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지역 출신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풍경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내 사진에 표현하고 싶은 주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20여년 전부터 제주에 내려와 그림처럼 아름답고 정겨운 제주의 자연을 고집스레 찍어온
사진작가 김영갑(48·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씨가 제주도에서의 삶과 사진 예술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들을 담은 〈그 섬에 내가 있었네〉(휴먼 앤드 북스)를 펴냈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그의 갤러리에 들어서면 제주의 바람을 느낀다.
갤러리 정원에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오랜 바람결에 누웠음직한 팽나무와 올래(제주의 전통적인
마을 좁은 길), 돌 그리고 사람이 있다.
근육이 위축되는 불치병인 루게릭병을 앓으면서도 작품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는 그의 갤러리에는
제주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제주도를 떠나지 못하게 한 매력을 옮겨 심으려고 노력했다”는 그는 “땅이 필름이라면, 나는
그 위에 사진을 찍고 있는 것”이라며 갤러리 정원을 이야기했다.
1985년 2월 제주에 정착한 그는 오직 제주의 자연을 찍는데 모든 열정을 바쳤다고 한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무, 고구마로 허기를 달래기도 했다.
제주 땅에 살면서 대했던 자연과 사람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모은 이번 책에서 그는
“셔터를 누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강력한 그 순간을 위해 같은 장소를 헤아릴 수 없이 찾아가고
또 기다렸다”고 자신의 예술적 영감과 작품에 대한 처절하기까지 한 집념을 표현했다.
그러던 그가 4년 전 자다보면 다리에 쥐가 나고 손이 떨리며 마비 증세를 보이는 게 이상해
서울에서 병원 검진을 받은 결과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말을 오래하면 혀가 굳어져 말을 하지 못하는 그는 전화를 받거나 간단한 물건을 들 때라도 두 손을
곧추 잡아야 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치료를 받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름다움이 영혼을 구원해주듯이 자연에도 병에
대한 치유능력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예전에는 제주도를 절망의 땅이라고 했잖아요. 절망의 끝에 서니까 제주도를 들여다 볼 수 있고,
제주 토박이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제주사람을 찍고 싶어요.”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