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모악
[국민일보 2004/01/04] 루게릭병 상반신 마비 사진작가 김영갑씨

루게릭병 상반신 마비 사진작가 김영갑씨

 

생명처럼 아끼는 나의 사진과 필름이 애물단지 취급을 받느니 차라리 병든 육신과 함께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명예롭겠지요?.”

섬의 풍경에 홀려 20년 동안 오로지 오름 등 제주도의 자연만을 필름에 담아온 사진작가 김영갑씨(48)

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더니 끝내 말끝이 흐려진다. 나비박사 석주명씨가 평생 채집한 수만점의 나비

표본을 모두 불태우고 죽음을 맞았듯 분신이나 다름없는 그의 필름과 사진들이 한줄기 파르스름한

연기로 변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서글픔 때문이리라.

1957년 충남 부여 출생,서울 한양공고 졸업,1985년 제주도 정착,개인전 16,1999년 루게릭병 발병,

2001년 루게릭병 진단,2002년 김영갑갤러리 오픈,그리고 독신생활?. 공모전 응모 등 돈과 명성을

마다한 아웃사이더 사진작가 김영갑씨의 이력은 곡절 많은 삶에 비해 의외로 간단하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큰 형이 카메라를 한 대 선물했습니다. 그래서 친구 아버지의 사진관에서 심부름

하며 어깨너머로 사진기술을 익혔지요.”

중학생 때부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대학 진학조차 포기한 채 당시로선 생소한 프리랜서 사진

작가를 꿈꾼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작품구상을 하던 그는 우연히 방문했던 제주도의 때묻지 않은

대자연에 매료돼 1985년 아예 보따리를 싸들고 제주도로 날아간다.

하지만 돈 한푼 없는 댕기머리 총각 김영갑의 제주생활은 역경의 나날이었다. 배가 고파 무를 뽑아

먹다 곤욕을 치르고,빨갱이로 몰려 경찰서 대공과에 불려가 취조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을 필름에 한컷 한컷 담아두는 기쁨에 육신의 고달픔이나 물질의 궁핍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영갑의 삶과 작품세계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그의 파노라마 풍경사진은 한 장도 우연히 찍힌 것이

없다. 절벽에 몸을 매달고 사진을 찍는가 하면 세월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해 같은 장소에서 10년의

세월을 두고 사진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렇게 찍은 필름만 무려 30만롤.

지금도 형편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끼니 때면 늘 서글펐습니다. 필름값과 인화비가 워낙 비싸

다보니 셔터 한 번 안누르면 한끼를 라면으로 때울 수 있었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되더군요.”

김영갑씨가 온몸의 근육이 마비되는 루게릭병에 걸린 것은 5년여전.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 손이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무거운 장비를 들고 다니느라 오십견에 걸렸겠거니니 하고 대수롭잖게 생각

했으나 날이 갈수록 병의 진행속도는 빨랐다. 2001년 병원을 찾은 그는 희귀병인 루게릭병에 걸렸

다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진단을 받는다.

손이 마비된다는 의사의 말은 사진작가인 내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어요.”

한동안 충격에 휩싸여 방황하던 그는 완치 불능의 루게릭병에 걸렸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리고 맨 먼저 한 일이 남제주군 성산읍 삼달리의 허름한 초등학교 폐교를 임대해 갤러리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몸이 성한 사람도 하기 힘들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가 갤러리 공사에 나선 것은 지금은

개발이란 미명아래 사라져버린 제주도의 옛풍경을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과 함께 노동을 통해

온몸의 마비현상을 지연시켜 보겠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갤러리 공사중에도 몸은 점점 야위어 70이 넘던 몸무게가 47으로 줄었다. 운동장의 작은

돌부리에 스치기만 해도 나무토막처럼 맥없이 쓰러졌다. 두 팔이 마비된 김영갑씨를 가장 난처하게

한 것은 대변을 본 후에 휴지를 잡거나 머리 감을 힘이 없다는 사실. 이때부터 그는 체중계에

오르는 것과 거울 보는 것을 포기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마비현상이 빨라집니다. 그래서 일부러 간병인을

두지 않았지요. 보통 루게릭병 환자는 35년이면 온몸이 마비되고 결국 호흡조차 못해 사망에

이르게 되지만 저는 벌써 5년이란 세월을 견뎌냈어요.”

김영갑씨의 투병생활이 다른 루게릭병 환자보다 힘든 것은 도와줄 사람이 없는 독신이기 때문.

한때 결혼하고픈 여인이 있었지요. 하지만 예술 한답시고 아내의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혼자 살고 있지요. 결과적으로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의 구애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절절한 심경을 지난 1996년에

펴낸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란 에세이집에서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그의 어린시절 기억은 늘

술취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가득차 있었고 그럴수록 고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의 정은 깊어

졌다. 아내로서 누려야 할 행복이 남편의 술 때문에 희생됐다고 생각한 그는 술보다 몇 배 중독성이

심한 예술의 길에 사랑하는 사람을 동반할 수 없었다.

날개 꺾인 새와 다리 부러진 노루가 다시 날고 뛰어다니는 것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대자연에는 과학으로 설명못할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이 내 병을 고쳐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몸이 좋아지면 갤러리 정원에서라도 제주도의 숨결을 찍어보겠다는 희망에 그는 요즘도 아픈 몸을

이끌고 하루종일 공사를 지휘한다. 지인들이 찾아와 치료비에 보태쓰라고 주고 간 몇푼의 돈이

공사비로 전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

김영갑씨는 작년 5월 이후 전혀 치료를 받지 않고 있다. 하지만 병세가 더 악화되지는 않는단다.

그렇다고 호전될 기미도 없다. 최근 사진잡지 평생구독을 신청한 것이 내일에 대한 희망이라면 이달

중순 발간되는 그의 두번째 에세이집은 파란만장한 삶과 작품활동을 정리하는 듯해 코끝을 찡하게

한다.

러시아 가수 이오시프 다비도비치 코브존의 백학의 선율이 은은하게 흐르는 대전시실 두모악

(한라산의 옛 이름)’의 출입구 나무의자에 앉아 상념에 젖어있는 그의 눈빛은 젓가락처럼 말라가는

육신과 달리 3년전 바닷가 횟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직도 형형하다.

땅속에서 막 파낸 붉은색 화산암도 햇빛과 바람에 오랜 세월 노출되면 검게 변합니다.”

돌이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겠다고 정원에 구멍이 숭숭뚫린 화산암으로 돌담을 만들더니 예전처럼

갈옷을 만들어 입기 위해 올 봄엔 감나무도 심겠단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충분히 즐기고 내일 새날이 밝으면 그것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셔터를 누를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하루 하루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맞서 들판의 풀과 나무처럼 새로운 희망을 심는 사진작가

김영갑씨. 그는 어쩌면 제주도의 돌담처럼 영원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박강섭기자 kspark@kmib.co.kr